다양한 용술관과 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관련 보도자료를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총본부 용술관 보도자료

[2004.4 문화일보] ‘氣찬 3000手’ 찰나의 급소타격합기유술 김윤상

작성자
합기유술총본부
작성일
2022-12-02 16:15
조회
6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4041701031633006002

게재 일자 : 2004년 04월 17일(土)
2004041701031633006002_b.jpg?v=20221202161235

무술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는 뭘까. 적지 않은 이들이 아마도 도복과 블랙벨트를 꼽을 것 같다. 도복에 흥건히 배어오는 땀, 그 퀴퀴한 냄새가 그저 좋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흰 띠 매고 시작해 검은 띠 따고, 그 검은 띠도 수련세월이 흘러 색 바래고 해져 흰 띠처럼 돌아가고…. 그런데 고단자들일수록 이런 향수에만 푹 젖어서는 수련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목에 힘이 들어가고부터는 ‘내가 어떻게 ‘아랫것들(?)’과 몸 부대끼며 운동할 수 있겠느냐’는 심사가 되는 것이다. 도장 관장쯤 되는 이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일일 게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고희가 지난 나이에도 새벽, 저녁으로 하는 하루 2번의 수련을 거른 적이 없다. 알고보니 그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충남 금산의 ‘용술관(龍術館)’. 한국합기유술 총본부 도장으로 아주 이름난 곳이다. 여기서 합기도 창시자 고(故) 최용술 도주의 고제(高弟) 김윤상(71) 총재가 30여년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 합기유술 3대 도주이기도 한 김 총재는 지난 84년 최 도주로부터 합기유술 9단을 받았다. 용술관은 물론 최 도주의 이름을 딴 도장명이다. 나이 40에 도주로부터 무술을 배운 늑깎이 무술인. 그러나 워낙 열심히 배운 터라 현재 최 도주의 술기를 가장 잘 이어받은 전인으로 평가받는다. 홀쭉한 체구에 찬찬한 말투의 그는 흔히 이웃에서 볼 수 있는 할아버지로밖에 안보인다. 그런데 그에겐 엄청난 무술이 숨겨져 있었다.

최 도주는 총재에게 새로운 무술의 세계를 보여줬다. 손만 얽었다 하면 상대가 거짓말처럼 펑펑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도주의 합기유술은 총재가 익힌 합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무술이었다. 힘을 적게 들여도 상대 관절을 쉽게 꺾을 수 있었다. 반면 유도식으로 완력을 사용해 집어던지는 기술은 ‘하수(下手)’라고 해 쓰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당하는 사람은 상처를 입질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탄복한 총재는 금산에서 대구로 최 도주를 찾아가 무술을 익힌다. 두달마다 한번씩 들러 한번에 30여가지의 술기를 배워온 뒤, 연마하고 또다시 도주를 찾아 술기를 시연해보는 식이었다. 무술수련은 주로 도주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대구도관이 경제적인 이유로 그만 문을 닫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도주는 김 총재의 열정을 높이 사 자신의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술기를 풀어줬다는 것. 도주 자신도 합기유술에 대한 엄청난 애착을 가졌었다 한다.

“(유술은) 한국의 보물이니 부단히 익혀 연마한 뒤 전승하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죠. 병상에 누운 도주를 문병차 찾아갔을 때조차 도주는 ‘내가 죽는 것 보러왔느냐. 너는 이불을 펴고 무술수련이나 하라’고 다그쳤을 정도였으니까….”

최 도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최고수로 칭송받는 다케다 소오가쿠 선생 밑에서 대동류 유술을 배워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와 무술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런 도주는 일본에서 종종 자신이 겪었던 혹독한 수련을 곱씹으며 ‘너희가 하는 수련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 수년간의 입산수련은 기본이요, 수련시 사부 다케다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고는 했다는 것이다. 최 도주가 오죽했으면 “꼭 부엉이 같은 게(소오가쿠)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때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었다”고 제자들에게 털어놓기까지 했을까. 그런데 소오가쿠는 유술고수이기에 앞서 검(劍)의 대가(大家)였다. 항상 닛폰도를 이부자리 옆에 놓고 잠을 청했는데 인기척만 들리면 잠결에도 어느새 손이 검에 가 있었단다. 그런데 최 도주가 고련을 거쳐 일가를 이룬 뒤엔 다케다 선생이 “일본에서 검술은 내가 최고요, 맨손 기술은 니(최 도주)가 으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술계에서는 스승이 제자의 기예를 이처럼 칭찬하는 일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총재가 전한 최 도주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현재 도주가 다케다 선생 밑에서 무술수련을 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유술의 우수성이 한국에 건너간 최 도주로 인해 일순간에 무너질테니, 일본인들이 최 도주 행적이 담긴 문서를 고의로 폐기해 버렸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유술은 사무라이들이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결판내던 무술이다. 유술을 펼치면 마치 진검을 뽑아 맞서는 것과 같다. “(유술고수에게 달려드는 것은) 여름철 하루살이가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라는 게 최 도주가 남긴 명언.

김 총재가 합기술을 펼친다. 손목 근육이 죄다 시꺼멓게 죽고 정권 뼈마디 마다 툭툭 불거진 옹이가 잡힌 사범들과 손을 섞었다. 총재의 술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최 도주 술기는 모두 3608가지 수(手)였다. 검과 창 등 무기술을 뺀 맨손기술만 2000여 가지. 총재는 이중 절반을 조금 넘게 익혔다. 평생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기술을 수련했다더니 손만 갖다 대면 제자들이 펑펑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혹시 괜히 낙법을 쳐주며 넘어가 주는 게 아닐까 하고 기자도 총재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총재는 너무 쉽게 기자의 팔을 비틀어 꺾어낸다. 힘으로 견뎌보려 했지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목과 팔, 어깨까지 모든 상체 관절이 차곡차곡 꺾여 들어간 것이다. 완력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총재는 60kg이 채 못나가는 왜소한 체구다. 그 몸으로 130kg 나가는 파란눈 외국인 수련생들 팔목도 쉽게 꺾는단다. 그게 분명 합기(合氣)일 것이다.

“다들 그런 질문을 해요. 그런데 나도 뾰족히는 설명할 수 없는 걸 어쩌겠어요. 도주 당신도 ‘이게 합기다’라고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고요.” 합기는 말 그대로 기(氣)를 조화시킨다는 뜻이다. 기자는 기공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을 꽤나 찾아다녔다. 손바닥에 종이컵을 올려놓고는 기를 사용해 날린다거나 장풍까지 쏜다는 사람들을 여럿 찾았었다. 그런데 기자가 통 둔해서인지 그들이 말하는 기감(氣感)이 전혀 없었다. 어떤 이는 10m쯤 떨어져 벽을 보고 선 채 등으로 기를 받아보라고 했다. 가슴에 기를 쏘이면 몸이 크게 상하게 된다나. 그렇게 10여분씩을 서있곤 했는데도 어디 등짝이 간질거리는 것조차 느껴보질 못했던 것이다.

총재 얘기는 다르다. ‘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으고, 또 발현되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했다. 땀흘리고, 수련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말로 쉽게 풀어줄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합기가 아니라는 것. 최 도주도 고급 술기를 펼칠 때마다 그냥, ‘웃수다’ 또는 ‘정신’이라고 했단다. 총재도 ‘정신을 집중해 기를 모으는 것이 합기’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호흡을 더 깊게해주는 단전호흡은 아주 초보적인 기 수련법. 물론 폐에 들어차는 공기의 양을 많게 하기 위해 횡경막을 아래로 잡아내리는 내복근 단련법인 단전호흡은 합기를 위해 필요한 과정의 일부라 했다.

‘상대가 잡은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하나’, ‘상대가 손을 얽지 않고 순전히 타격 기술로만 싸우려 들면 어쩌겠나’는 질문에 총재는 ‘허허’하고 웃는다. 상대가 나를 잡는다는 것은 목숨을 취하려 드는 것일진대, 어찌 검을 뽑아들고는 그대로 도망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기자가 잡았던 손을 슬쩍 빼면서 물러나자 총재는 어느새 손목을 낚아채 들어온다. 기자가 잡든, 총재가 잡든 결과는 마차가지였다. 도망가는 상대는 잡아 꺾을 필요도 없단다. 그냥 한방 날리면 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먹 날치기, 망치치기, 안다리 차기 등의 32가지 타격기술을 보여준다. 모두 인체 급소를 노린 공격들. ‘맞으면 죽겠구나’ 싶은 매서움이 느껴진다.

시연 마지막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 연출됐다. 앉거나 누워서 한다는 술기인 좌술(坐術)과 와술(臥術). 총재가 등을 보이고 앉으니 사범들이 달려들어 등쪽 옷깃을 잡거나 머리카락을 움켜쥐다가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대단한 술기다. 술기는 뒤에 있는 적의 움직임을 오감을 통해 먼저 인지하는데서 시작된다. 적의 동태만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을 잡든, 아니면 옷깃, 귀를 잡아채더라도 상대 중심을 앞으로 무너뜨려 당겨내는 일이야 총재에겐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수차례 보인 시연에서 총재는 정말 뒤통수에 눈이 달린 양 정확한 동작을 선뵌다.

이런 건 또 어떤가. 총재가 손도 안댔는데 상대는 맥을 못춘다. 총재의 손가락 하나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다가는 바닥에 풀썩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일본 아이기도(合氣道) 동영상을 통해 여러번 봤던 장면과 흡사하다. 당시 기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을 밑바탕에 깐 행동들일 것으로 추측했었다. 사부가 기술을 걸었는데 감히 안 넘어가서야 되겠느냐며 그냥 쓰러져 주는 것이다. 총재의 설명은 이랬다. 상대의 공격을 읽고 미리 대처한다는 것. 상대가 손목을 잡으러 들어오는 찰나를 읽어 먼저 자신의 손을 들어 상대 눈앞에 놓는 식이다. 그 순간 상대의 손은 죽은 손이 되고, 내 공격은 살아있으니 충분히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견문이 짧은 기자로서는 판단이 안섰다. 물론 총재 말대로라면 그는 범인으로서는 결코 알아챌 수 없는 그런 공력을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김 총재는 지난 30여년간 낡고 헌 도복을 입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도복을 벗지 말라’는 최 도주의 말을 따른 것이다. ‘시원찮은 합기도 기술로는 내 손목을 꺾을 수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금산 용술관을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무언가 느끼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수련하며 흘린 소중한 땀방울의 참 의미를 말이다.

박수균기자 freewill@munhwa.com


 

용술관에서는 그분 술기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사명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1980년 7월 26일 최용술도주님은 도장명(道場名)을 자신의 함자에서 한자만 달리하여
용술관으로 명명(命名) 하시고 이를 증명하는 문서인 명명서를 남기셨습니다.

다양한 용술관과 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관련 보도자료를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총본부 용술관 보도자료

[2004.4 문화일보] ‘氣찬 3000手’ 찰나의 급소타격합기유술 김윤상

작성자
합기유술총본부
작성일
2022-12-02 16:15
조회
6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4041701031633006002

게재 일자 : 2004년 04월 17일(土)
2004041701031633006002_b.jpg?v=20221202161235

무술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 1호는 뭘까. 적지 않은 이들이 아마도 도복과 블랙벨트를 꼽을 것 같다. 도복에 흥건히 배어오는 땀, 그 퀴퀴한 냄새가 그저 좋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흰 띠 매고 시작해 검은 띠 따고, 그 검은 띠도 수련세월이 흘러 색 바래고 해져 흰 띠처럼 돌아가고…. 그런데 고단자들일수록 이런 향수에만 푹 젖어서는 수련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목에 힘이 들어가고부터는 ‘내가 어떻게 ‘아랫것들(?)’과 몸 부대끼며 운동할 수 있겠느냐’는 심사가 되는 것이다. 도장 관장쯤 되는 이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일일 게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고희가 지난 나이에도 새벽, 저녁으로 하는 하루 2번의 수련을 거른 적이 없다. 알고보니 그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충남 금산의 ‘용술관(龍術館)’. 한국합기유술 총본부 도장으로 아주 이름난 곳이다. 여기서 합기도 창시자 고(故) 최용술 도주의 고제(高弟) 김윤상(71) 총재가 30여년 무술을 가르치고 있다. 합기유술 3대 도주이기도 한 김 총재는 지난 84년 최 도주로부터 합기유술 9단을 받았다. 용술관은 물론 최 도주의 이름을 딴 도장명이다. 나이 40에 도주로부터 무술을 배운 늑깎이 무술인. 그러나 워낙 열심히 배운 터라 현재 최 도주의 술기를 가장 잘 이어받은 전인으로 평가받는다. 홀쭉한 체구에 찬찬한 말투의 그는 흔히 이웃에서 볼 수 있는 할아버지로밖에 안보인다. 그런데 그에겐 엄청난 무술이 숨겨져 있었다.

최 도주는 총재에게 새로운 무술의 세계를 보여줬다. 손만 얽었다 하면 상대가 거짓말처럼 펑펑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도주의 합기유술은 총재가 익힌 합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무술이었다. 힘을 적게 들여도 상대 관절을 쉽게 꺾을 수 있었다. 반면 유도식으로 완력을 사용해 집어던지는 기술은 ‘하수(下手)’라고 해 쓰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당하는 사람은 상처를 입질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탄복한 총재는 금산에서 대구로 최 도주를 찾아가 무술을 익힌다. 두달마다 한번씩 들러 한번에 30여가지의 술기를 배워온 뒤, 연마하고 또다시 도주를 찾아 술기를 시연해보는 식이었다. 무술수련은 주로 도주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대구도관이 경제적인 이유로 그만 문을 닫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도주는 김 총재의 열정을 높이 사 자신의 방에 이불을 깔아놓고 술기를 풀어줬다는 것. 도주 자신도 합기유술에 대한 엄청난 애착을 가졌었다 한다.

“(유술은) 한국의 보물이니 부단히 익혀 연마한 뒤 전승하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죠. 병상에 누운 도주를 문병차 찾아갔을 때조차 도주는 ‘내가 죽는 것 보러왔느냐. 너는 이불을 펴고 무술수련이나 하라’고 다그쳤을 정도였으니까….”

최 도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 최고수로 칭송받는 다케다 소오가쿠 선생 밑에서 대동류 유술을 배워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와 무술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런 도주는 일본에서 종종 자신이 겪었던 혹독한 수련을 곱씹으며 ‘너희가 하는 수련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 수년간의 입산수련은 기본이요, 수련시 사부 다케다로부터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고는 했다는 것이다. 최 도주가 오죽했으면 “꼭 부엉이 같은 게(소오가쿠) 너무 보기 싫어서 잠을 잘때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숱하게 느꼈었다”고 제자들에게 털어놓기까지 했을까. 그런데 소오가쿠는 유술고수이기에 앞서 검(劍)의 대가(大家)였다. 항상 닛폰도를 이부자리 옆에 놓고 잠을 청했는데 인기척만 들리면 잠결에도 어느새 손이 검에 가 있었단다. 그런데 최 도주가 고련을 거쳐 일가를 이룬 뒤엔 다케다 선생이 “일본에서 검술은 내가 최고요, 맨손 기술은 니(최 도주)가 으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술계에서는 스승이 제자의 기예를 이처럼 칭찬하는 일은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총재가 전한 최 도주의 말이 사실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현재 도주가 다케다 선생 밑에서 무술수련을 한 기록이 일절 남아있지 않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유술의 우수성이 한국에 건너간 최 도주로 인해 일순간에 무너질테니, 일본인들이 최 도주 행적이 담긴 문서를 고의로 폐기해 버렸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유술은 사무라이들이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결판내던 무술이다. 유술을 펼치면 마치 진검을 뽑아 맞서는 것과 같다. “(유술고수에게 달려드는 것은) 여름철 하루살이가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라는 게 최 도주가 남긴 명언.

김 총재가 합기술을 펼친다. 손목 근육이 죄다 시꺼멓게 죽고 정권 뼈마디 마다 툭툭 불거진 옹이가 잡힌 사범들과 손을 섞었다. 총재의 술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최 도주 술기는 모두 3608가지 수(手)였다. 검과 창 등 무기술을 뺀 맨손기술만 2000여 가지. 총재는 이중 절반을 조금 넘게 익혔다. 평생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기술을 수련했다더니 손만 갖다 대면 제자들이 펑펑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혹시 괜히 낙법을 쳐주며 넘어가 주는 게 아닐까 하고 기자도 총재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총재는 너무 쉽게 기자의 팔을 비틀어 꺾어낸다. 힘으로 견뎌보려 했지만 주저앉고 말았다. 손목과 팔, 어깨까지 모든 상체 관절이 차곡차곡 꺾여 들어간 것이다. 완력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총재는 60kg이 채 못나가는 왜소한 체구다. 그 몸으로 130kg 나가는 파란눈 외국인 수련생들 팔목도 쉽게 꺾는단다. 그게 분명 합기(合氣)일 것이다.

“다들 그런 질문을 해요. 그런데 나도 뾰족히는 설명할 수 없는 걸 어쩌겠어요. 도주 당신도 ‘이게 합기다’라고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고요.” 합기는 말 그대로 기(氣)를 조화시킨다는 뜻이다. 기자는 기공에 일가견이 있다는 사람들을 꽤나 찾아다녔다. 손바닥에 종이컵을 올려놓고는 기를 사용해 날린다거나 장풍까지 쏜다는 사람들을 여럿 찾았었다. 그런데 기자가 통 둔해서인지 그들이 말하는 기감(氣感)이 전혀 없었다. 어떤 이는 10m쯤 떨어져 벽을 보고 선 채 등으로 기를 받아보라고 했다. 가슴에 기를 쏘이면 몸이 크게 상하게 된다나. 그렇게 10여분씩을 서있곤 했는데도 어디 등짝이 간질거리는 것조차 느껴보질 못했던 것이다.

총재 얘기는 다르다. ‘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으고, 또 발현되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했다. 땀흘리고, 수련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말로 쉽게 풀어줄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합기가 아니라는 것. 최 도주도 고급 술기를 펼칠 때마다 그냥, ‘웃수다’ 또는 ‘정신’이라고 했단다. 총재도 ‘정신을 집중해 기를 모으는 것이 합기’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호흡을 더 깊게해주는 단전호흡은 아주 초보적인 기 수련법. 물론 폐에 들어차는 공기의 양을 많게 하기 위해 횡경막을 아래로 잡아내리는 내복근 단련법인 단전호흡은 합기를 위해 필요한 과정의 일부라 했다.

‘상대가 잡은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하나’, ‘상대가 손을 얽지 않고 순전히 타격 기술로만 싸우려 들면 어쩌겠나’는 질문에 총재는 ‘허허’하고 웃는다. 상대가 나를 잡는다는 것은 목숨을 취하려 드는 것일진대, 어찌 검을 뽑아들고는 그대로 도망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기자가 잡았던 손을 슬쩍 빼면서 물러나자 총재는 어느새 손목을 낚아채 들어온다. 기자가 잡든, 총재가 잡든 결과는 마차가지였다. 도망가는 상대는 잡아 꺾을 필요도 없단다. 그냥 한방 날리면 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먹 날치기, 망치치기, 안다리 차기 등의 32가지 타격기술을 보여준다. 모두 인체 급소를 노린 공격들. ‘맞으면 죽겠구나’ 싶은 매서움이 느껴진다.

시연 마지막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 연출됐다. 앉거나 누워서 한다는 술기인 좌술(坐術)과 와술(臥術). 총재가 등을 보이고 앉으니 사범들이 달려들어 등쪽 옷깃을 잡거나 머리카락을 움켜쥐다가는 앞으로 고꾸라진다. 대단한 술기다. 술기는 뒤에 있는 적의 움직임을 오감을 통해 먼저 인지하는데서 시작된다. 적의 동태만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머리카락을 잡든, 아니면 옷깃, 귀를 잡아채더라도 상대 중심을 앞으로 무너뜨려 당겨내는 일이야 총재에겐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수차례 보인 시연에서 총재는 정말 뒤통수에 눈이 달린 양 정확한 동작을 선뵌다.

이런 건 또 어떤가. 총재가 손도 안댔는데 상대는 맥을 못춘다. 총재의 손가락 하나에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하다가는 바닥에 풀썩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일본 아이기도(合氣道) 동영상을 통해 여러번 봤던 장면과 흡사하다. 당시 기자는 스승에 대한 존경을 밑바탕에 깐 행동들일 것으로 추측했었다. 사부가 기술을 걸었는데 감히 안 넘어가서야 되겠느냐며 그냥 쓰러져 주는 것이다. 총재의 설명은 이랬다. 상대의 공격을 읽고 미리 대처한다는 것. 상대가 손목을 잡으러 들어오는 찰나를 읽어 먼저 자신의 손을 들어 상대 눈앞에 놓는 식이다. 그 순간 상대의 손은 죽은 손이 되고, 내 공격은 살아있으니 충분히 상대를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견문이 짧은 기자로서는 판단이 안섰다. 물론 총재 말대로라면 그는 범인으로서는 결코 알아챌 수 없는 그런 공력을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김 총재는 지난 30여년간 낡고 헌 도복을 입지 않은 날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도복을 벗지 말라’는 최 도주의 말을 따른 것이다. ‘시원찮은 합기도 기술로는 내 손목을 꺾을 수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금산 용술관을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무언가 느끼고 돌아서게 될 것이다. 수련하며 흘린 소중한 땀방울의 참 의미를 말이다.

박수균기자 freewill@munhwa.com


 

용술관에서는 그분 술기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사명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1980년 7월 26일 최용술도주님은 도장명(道場名)을 자신의 함자에서 한자만 달리하여
용술관으로 명명(命名) 하시고 이를 증명하는 문서인 명명서를 남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