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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총본부 용술관 보도자료

[무카스] 2006.6 용술관 방문기 - 용술관과 합기도

작성자
합기유술총본부
작성일
2022-09-05 14:02
조회
46
 

https://mookas.com/news/4221

용술관 방문기 - 용술관과 합기도





발행일자 : 2006-06-19 00:00:00

박성진 기자




060619_yongsul_01.jpg3년여 만에 만난 김윤상 총재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대한민국 전역을 사로잡고 있는 2006년 6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기자는 금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유명한 금산 용술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용술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부 언론과 무술전문매체 등을 통해 한국 합기도의 시조인 고 최용술 선생의 기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용술관의 수장인 김윤상 총재(73)는 70년대 초반부터 금산과 대구를 오가며 최용술 선생에게서 합기유술을 사사한 직제자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매일같이 도복을 입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무술계에서 보기 힘든 진정한 무술인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용술관은 현재 금산의 본부도장을 중심으로 대전과 청주, 서울에 지부도장을 열고 용술관 스타일의 합기도를 전파하고 있다.

사실, 기자는 용술관이 2002년 처음 서울 수련모임을 열었을 때부터 3개월 정도 수련에 참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당시 서울 수련모임을 이끌던 신훈 관장을 비롯하여 대전의 박상귀, 강병욱, 성낙용 관장은 물론이고 김윤상 총재의 손목을 잡아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의 무술 실력은 얼치기이므로 그 분들의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자가 접했던 다른 무술이나 합기도 유파의 기술들과 용술관의 기술이 달랐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기자는 용술관 합기도 외에도 서울 강남의 한 도장에서 아이키도를 함께 수련하고 있었고, 수년 전에는 대한합기도협회 계열의 합기도도장에서 수련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합기도와 용술관 그리고 아이키도가 어떻게 다른지 정도에 대해서는 구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 대동류를 주장하며 주목을 받았던 송일훈 관장의 수련에도 두 세 차례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경험으로 볼 때 용술관, 아이키도, 대동류(송 관장의)는 비슷한 점들도 있지만, 스타일 면에서 차이점이 더 크게 느껴졌고,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세 가지 모두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자가 완력이 센 것도 아니고, 무술의 고수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대단하게 보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지니지 못한 살리에르의 눈만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자였기에 세 가지 무술들의 기술적 우수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제자들의 손목을 잡아가며 지도를 하던 김윤상 총재에 대해서는 무술계 언저리에 있는 기자로서는 특별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김윤상 총재를 3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용술관과 다른 스타일 합기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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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총재(좌)의 술기 지도


기자가 금산 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30분 정도였다. 도장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역시 그 수련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김윤상 총재였다. 기자가 들어서자 수련중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를 맞아주셨고, 기자는 수련이 끝나지 않았기에 수련을 마칠 때까지 참관할 수 있었다.

이 날 수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띠. 각 지부도장의 지도자급 수련생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예전에 비해 검은띠가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랫만에 보는 용술관의 술기였지만 3년 전 수련에 참가할 때의 느낌이 선명했다. 도복을 가져왔어야 했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얼마 전 다른 운동을 하다 조금 다친 손목을 생각하니, 안 가져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만큼 용술관의 손목술기는 다른 곳에 비해서 매우 아프기 때문이다. 아이키도였다면, 손목을 조금 다쳤어도 수련에 참가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용술관과 아이키도의 많은 차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9시부터 시작된 수련은 1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그 수련 내내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기가 50대 정도로 보이는 김윤상 총재가 지도를 계속했다. 이 수련모임은 지방의 지도자급 수련생을 위주로 매주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주중에는 금산의 수련생을 매일같이 김 총재가 또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흔셋의 나이에 말이다. 김윤상 총재 외에 이렇게 매일같이 자기 수련과 제자 지도를 하고 있는 원로 합기도 지도자를 기자는 들어보거나 만나본 적이 없다.

수련을 마치고 김 총재는 자신의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곳에서 김 총재는 소중히 모아둔 최용술 선생과 용술관의 자료들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김 총재가 기자에게 자료를 공개한 이유는 얼마 전 무토미디어에 올라온 글 중 [최용술 직제자 금산의 조명용, 박희수 선생을 찾아서라는 글에 대해 김 총재가 바로잡을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직제자란 무엇인가.

김 총재가 문제를 삼은 부분은 위의 글 중 박희수, 조명용 선생을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김 총재에 따르면 박희수 선생과 조명용 선생은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할 수는 없고, 굳이 따지자면, 본인과 고 이영수 선생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용술관은 이영수 선생과 김윤상 선생이 총관장과 관장을 맡아 운영을 해왔고, 박희수 선생은 그 용술관의 사범이었으며 조명용 선생은 수련생이었다는 것이다. 최용술 선생이 금산을 찾아와 지도한 것은 1년에 2,3회에 불과하므로 대구까지 직접 찾아가서 배운 이영수 선생과 김윤상 총재 본인은 직제자라고 할 수 있어도 박희수, 조명용 선생은 직제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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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종가로부터 김 총재가 받은 제3대도주 임명서


물론 이에 대한 유술관의 박희수, 조명용 선생의 입장은 다르다. 이 분들의 논쟁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자세한 입장은 필요한 경우 별도의 글로 대체하기로 한다.

다만, 어느 정도를 배워야 직제자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하나의 견해로 모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김윤상 총재나 용술관에서는 현재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김윤상 총재가 유일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높은 단(9단)을 직접 최용술 선생에게서 받았으며, 현재도 최용술 선생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용술관이 유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한민국합기도 제3대 도주 김윤상 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합기도 관계자가 아닌 기자가 왈가왈부를 할 부분은 아니지만, 논란의 소지가 충분히 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 합기도의 정체성에는 혼란의 여지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기자에게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것은 한국의 무술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면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들이었다. 문제는 있으되 그 해결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해결점을 안다면, 독자들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련만….


 

용술관에서는 그분 술기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사명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1980년 7월 26일 최용술도주님은 도장명(道場名)을 자신의 함자에서 한자만 달리하여
용술관으로 명명(命名) 하시고 이를 증명하는 문서인 명명서를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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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합기도 합기유술

총본부 용술관 보도자료

[무카스] 2006.6 용술관 방문기 - 용술관과 합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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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유술총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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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14:02
조회
46
 

https://mookas.com/news/4221

용술관 방문기 - 용술관과 합기도





발행일자 : 2006-06-19 00:00:00

박성진 기자




060619_yongsul_01.jpg3년여 만에 만난 김윤상 총재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대한민국 전역을 사로잡고 있는 2006년 6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기자는 금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유명한 금산 용술관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용술관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일부 언론과 무술전문매체 등을 통해 한국 합기도의 시조인 고 최용술 선생의 기술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용술관의 수장인 김윤상 총재(73)는 70년대 초반부터 금산과 대구를 오가며 최용술 선생에게서 합기유술을 사사한 직제자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매일같이 도복을 입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무술계에서 보기 힘든 진정한 무술인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용술관은 현재 금산의 본부도장을 중심으로 대전과 청주, 서울에 지부도장을 열고 용술관 스타일의 합기도를 전파하고 있다.

사실, 기자는 용술관이 2002년 처음 서울 수련모임을 열었을 때부터 3개월 정도 수련에 참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당시 서울 수련모임을 이끌던 신훈 관장을 비롯하여 대전의 박상귀, 강병욱, 성낙용 관장은 물론이고 김윤상 총재의 손목을 잡아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의 무술 실력은 얼치기이므로 그 분들의 실력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자가 접했던 다른 무술이나 합기도 유파의 기술들과 용술관의 기술이 달랐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기자는 용술관 합기도 외에도 서울 강남의 한 도장에서 아이키도를 함께 수련하고 있었고, 수년 전에는 대한합기도협회 계열의 합기도도장에서 수련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합기도와 용술관 그리고 아이키도가 어떻게 다른지 정도에 대해서는 구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에 대동류를 주장하며 주목을 받았던 송일훈 관장의 수련에도 두 세 차례 참가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경험으로 볼 때 용술관, 아이키도, 대동류(송 관장의)는 비슷한 점들도 있지만, 스타일 면에서 차이점이 더 크게 느껴졌고,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세 가지 모두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자가 완력이 센 것도 아니고, 무술의 고수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대단하게 보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지니지 못한 살리에르의 눈만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자였기에 세 가지 무술들의 기술적 우수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제자들의 손목을 잡아가며 지도를 하던 김윤상 총재에 대해서는 무술계 언저리에 있는 기자로서는 특별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김윤상 총재를 3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용술관과 다른 스타일 합기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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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상 총재(좌)의 술기 지도


기자가 금산 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30분 정도였다. 도장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역시 그 수련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김윤상 총재였다. 기자가 들어서자 수련중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를 맞아주셨고, 기자는 수련이 끝나지 않았기에 수련을 마칠 때까지 참관할 수 있었다.

이 날 수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띠. 각 지부도장의 지도자급 수련생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예전에 비해 검은띠가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랫만에 보는 용술관의 술기였지만 3년 전 수련에 참가할 때의 느낌이 선명했다. 도복을 가져왔어야 했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얼마 전 다른 운동을 하다 조금 다친 손목을 생각하니, 안 가져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만큼 용술관의 손목술기는 다른 곳에 비해서 매우 아프기 때문이다. 아이키도였다면, 손목을 조금 다쳤어도 수련에 참가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용술관과 아이키도의 많은 차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9시부터 시작된 수련은 1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그 수련 내내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기가 50대 정도로 보이는 김윤상 총재가 지도를 계속했다. 이 수련모임은 지방의 지도자급 수련생을 위주로 매주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주중에는 금산의 수련생을 매일같이 김 총재가 또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흔셋의 나이에 말이다. 김윤상 총재 외에 이렇게 매일같이 자기 수련과 제자 지도를 하고 있는 원로 합기도 지도자를 기자는 들어보거나 만나본 적이 없다.

수련을 마치고 김 총재는 자신의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곳에서 김 총재는 소중히 모아둔 최용술 선생과 용술관의 자료들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김 총재가 기자에게 자료를 공개한 이유는 얼마 전 무토미디어에 올라온 글 중 [최용술 직제자 금산의 조명용, 박희수 선생을 찾아서라는 글에 대해 김 총재가 바로잡을 것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직제자란 무엇인가.

김 총재가 문제를 삼은 부분은 위의 글 중 박희수, 조명용 선생을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김 총재에 따르면 박희수 선생과 조명용 선생은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할 수는 없고, 굳이 따지자면, 본인과 고 이영수 선생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용술관은 이영수 선생과 김윤상 선생이 총관장과 관장을 맡아 운영을 해왔고, 박희수 선생은 그 용술관의 사범이었으며 조명용 선생은 수련생이었다는 것이다. 최용술 선생이 금산을 찾아와 지도한 것은 1년에 2,3회에 불과하므로 대구까지 직접 찾아가서 배운 이영수 선생과 김윤상 총재 본인은 직제자라고 할 수 있어도 박희수, 조명용 선생은 직제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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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종가로부터 김 총재가 받은 제3대도주 임명서


물론 이에 대한 유술관의 박희수, 조명용 선생의 입장은 다르다. 이 분들의 논쟁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기에 자세한 입장은 필요한 경우 별도의 글로 대체하기로 한다.

다만, 어느 정도를 배워야 직제자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하나의 견해로 모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김윤상 총재나 용술관에서는 현재 최용술 선생의 직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김윤상 총재가 유일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이 배웠고, 가장 높은 단(9단)을 직접 최용술 선생에게서 받았으며, 현재도 최용술 선생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용술관이 유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한민국합기도 제3대 도주 김윤상 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합기도 관계자가 아닌 기자가 왈가왈부를 할 부분은 아니지만, 논란의 소지가 충분히 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 합기도의 정체성에는 혼란의 여지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금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기자에게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것은 한국의 무술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면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문제점들이었다. 문제는 있으되 그 해결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해결점을 안다면, 독자들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련만….


 

용술관에서는 그분 술기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사명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1980년 7월 26일 최용술도주님은 도장명(道場名)을 자신의 함자에서 한자만 달리하여
용술관으로 명명(命名) 하시고 이를 증명하는 문서인 명명서를 남기셨습니다.